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문단 편집) == 21세기에도 건재했던 범죄자 == [[http://hr-oreum.net/article.php?id=2395|26년, 형제복지원 <3> 87년 형제복지원, 아직도 건재하다 - 인권오름]]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10100022&ctcd=&cpage=1&commLstType=cindt|부산시와 형제 재단의 수상한 동거 - 월간조선]]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464|형제복지원 [[박인근]] 일가 부활한다 - 시사저널]]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40506161207404|[[박인근]] 일가 복지 재벌로 떵떵거리고 산다 - 시사저널]] 출소한 [[박인근]]은 개신교 집사가 되었다가 재육원(구 형제복지원)을 되찾고 이름을 바꿔 가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1991년에는 [[장애인 거주시설|중증장애요양원]] '실로암의 집'을 차리며 재단명을 '욥의마을'로 변경했고 2002년에는 형제복지지원재단, 2014년에는 느헤미야 등으로 법인명을 세탁했다. 재단측은 2001년에 '실로암의 집'을 기장군으로 옮기기 위해 주례동 부지를 팔고 2002년에는 사하구 장림동의 대형 레포츠센터, 2004년에는 괘법동 해수온천 건물을 각각 인수하여[* 단 그 중 'ㅂ'스포츠센터는 2011년에 건물 소유권이 넘어가서 형제복지지원재단 측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있다.] 사업부별로 나눠 가며 운영해 왔다. 게다가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의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셋째 아들 박천광은 "실로암의 집"[* 기장군 정관면 곰내재 부근에 있으며 약 400m 앞에 '''형제복지지원재단''' 정류장이 있다. 하지만 이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는 [[부산 버스 73|73번]]뿐인데 이 노선은 배차간격이 60~75분이다. 더 자주 오는 다른 노선을 이용하려고 해도 곰내터널입구까지 2.4km를 걸어야 하기에 탈출을 감행하려 하더라도 탈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2016년 재단 청산으로 문을 닫아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1030311232043445|폐건물이 됐다]]. 심지어 2002년 8월에는 이곳에서 호우로 인한 산사태가 발생하여 원생 4명이 매몰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때 [[박인근]]이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47325|내가 책임질 문제냐고, 내가 죽였냐!!!]]"'''라고 고함을 질렀다. 참고로 [[위키백과]]에도 [[https://ko.wikipedia.org/wiki/%EC%8B%A4%EB%A1%9C%EC%95%94_%EC%9A%94%EC%96%91%EC%9B%90_%EC%82%B0%EC%82%AC%ED%83%9C|해당 사건을 다룬 문서]]가 있다.]을 운영했다. 그의 독단적인 운영에 반발하는 이사들은 1명도 없었으며 특히 1990년부터 6번 이사를 지낸 이모씨는 2014년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자신은 서울에만 살며 1년에 몇번 정도만 부산으로 내려간다"고도 밝혔다. [[부산광역시]]로부터 지속적인 지원마저 받으며 재산과 재단을 불리고 끊임없이 위세를 이어 온 이들을 가리켜 언론에선 일명 '''"복지 재벌"''' 이라고 일컬었다. 또 박씨 일가는 __4·5공 군사정권에서 시작된 공권력이나 교계와의 유착이 매우 끈끈__하여 허가 없이 실로암의 집 내부에 무허가 종교기관을 세워서 운영해 왔고 관련 공무원들을 강사로 초청하였다. 이에 공무원들은 부산시의 특별감사를 받았으나 경징계에 그쳤으며 이마저도 징계 취소되었다고 한다.[[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464|#]] 박인근 대표는 2001년 주례동 토지 매각 당시 대금 중 20억원을 [[부산저축은행]]에 입금하면서 김양 부회장과 인연을 맺었고 부산저축은행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거액을 빌려댔다. 특히 2005년부터 4년간 재단이 그 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원을 불법대출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게다가 한국에만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2015년 3월 21일자와 <한겨레> '형제복지원' 3-4회 등에 따르면 1995년 6월 22일 호주의 대형 골프장을 운영하는 비상장법인 잡스타운 사를 인수하더니 부인 임씨와 딸, 사위에게 차례로 대표를 맡기고 거기에서 스탭으로 고용했던 소수의 인원[* 참고로 [[한국인]]이었는데 그것도 교민이 아니라 한국에서 데려온 직원이었다. 현지인이나 교민을 팼다가는 당연히 문제가 생기므로 영어를 못 해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 힘든 순수 한국인들만 데려와 부려먹은 것. 이 방식은 [[은혜로교회 피지섬 신도 감금사건|2018년에도 어떤 작자가 벤치마킹했음이 밝혀졌다.]]]조차 형제복지원 원생 부리듯 부린 것이 당시 스탭이었다가 쪽방촌에서 살던 어느 노인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또 처가 및 사위는 현지 한인교회에서 목사로 신분을 세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골프장 자체가 어찌 보면 한국에서의 일부 자산세탁 목적도 겸하고 있었던 듯.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터지자 형제복지원 문제가 다시 수면에 떠올랐고 2012년 9월 18일에는 부산시가 재단 감사결과를 발표하고 그 사실이 10월 24일 KBS2 <추적 60분>에도 보도됐다. 2014년 4월에 이런 사실이 드러나자 동년 5월 박천광은 시 보조금 횡령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박인근]]은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라 3년 구형만 받았을 뿐 재판이 실시되지 않았다. 검찰은 재단과 유착한 공무원들을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_print.asp?code=0300&key=20140517.22005222854|기소할 방침]]이라고 전했고 경남·부산 지역에서 복지 재벌로 이름을 떨친 [[박인근]] 일당의 이같은 복지 사업의 운용자금은 2014년 5월 시사저널이 조사한 결과 99%가 국고지원금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시는 "실로암의 집"을 법인 청산하려고 한다고 했지만 수십억대 금액을 지속적으로 차입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고 한다. || [[파일:external/hr-oreum.net/br2013_1.gif]] || [[파일:external/hr-oreum.net/br2013_2.gif]] || || "실로암의 집"의 모습 || 잠금장치가 있는 방의 모습 ||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br]그렇다면 2013년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운영하는 유일한 시설, 〈실로암의 집〉 모습은 어떠할까. 대부분의 거주인들이 70~80년대 수용시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스포츠형의 머리모양에 고무줄이 들어간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또 장애가 경한 사람들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뿐, 장애가 심한 사람들은 냉면 그릇 같은 커다란 그릇에 밥과 반찬을 모두 넣은 채 각자의 방안에서 혼자 벽을 보고 식사하고 있었다. 자해를 한다는 이유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침대에 끈을 묶어 허리를 결박한 사람도 있었고 하루 종일 창밖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채광이 되지 않는 방안에서는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고, 마당을 나와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층 건물에 1층만 거주인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고 2층 프로그램실, 교실(순회교육), 의무실은 모두 잠겨 있었다. 3층은 교회로, 공적인 시설에 무단으로 들어와 있어 부산시에 의해 고발조치 됐다. 공공시설물에 종교시설이 들어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4층은 뭘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한다. 그곳에서 십몇 년을 산 거주인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안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한.....그곳의 주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어디어디를 맘대로 못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1층 법인 사무실 한 쪽 벽면에는 6-7대의 CCTV 화면 모니터가 박혀 있었다. 섬뜩했다. 옛날 형제복지원을 운영, 유지했던 방식과 똑같이 거주인들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는 방증이니까.[br]그런데 문제는 이뿐만 아니었다. 식단 또한 딱 3가지 반찬에 먹을 것이 없었고, 어묵 반찬은 상했는지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부실한 식단 때문인지 거주인들 대부분은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의 일상은 그저 무기력하게 초점 없는 쾡한 눈으로 허공을 맴도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모든 거주인들의 방문에는 밖에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고 침대 외에 개인 소지품이라고 볼 수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지적, 자폐성 장애가 아닌 지체, 뇌병변장애가 있는 거주인 두 사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사를 표현했다. “'나가서 살고 싶다!”'고. 상기 뉴스타파에서 [[박인근]]을 취재하려고 할 때 항변한 [[박인근]]의 아들 박천광이 운영한 "실로암의 집" 역시 2013년 '인권오름'에서 조사한 결과 그다지 사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박인근]] 본인은 2011년 4월 7일에 재단 대표이사 자리를 3남 박천광에게 넘기고 병환으로 인해 자택과 요양병원을 오가며 칩거했다가 2016년 6월 27일에 전라남도의 모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2014년에 박인근 일가는 재단을 서종범 밀성학원 이사장에게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50116000069|팔았고]] 부산시에서 뒤늦게 법인 청산을 시도했다. 이에 재단 측이 법인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으나 2016년에 법원은 청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빼돌릴 것은 다 빼돌리고 빈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라 청산을 한다고 해도 국고 환수는커녕 적자 청산이 될 상황이라고 하며 기존 실로암의 집 이용자들은 타 시설로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60205000118|보내졌다]]. [[http://v.media.daum.net/v/20170303115316765|#]] 박인근 사후에도 막내딸은 사위와 함께 정신요양원을 운영하고 형제복지원 시절 총무였던 차남은 술집을 운영하는 등 사실상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2019년 2월 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도 해당 사건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육아원 시절 인권유린 행위까지 폭로되었다. 취재진들은 박인근 전 원장의 차남을 만났으나 그는 아버지에 대해 모른다며 당시의 일을 싹 다 부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